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페르 에빈드 스빈후부드 (문단 편집) === 노욕과 노망 === 농민당 당수 [[퀴외스티 칼리오]]는 본래 스빈후부드 못지않은 반공주의자였으나 그간의 극우세력의 준동을 거치면서 스빈후부드와 국민연합당에 환멸감을 느꼈고, 대승적으로 사민당과 손을 잡기로 했다. 당시 사민당 당권파는 [[배이뇌 탄네르]]를 비롯한 당내 우파였다. 스빈후부드가 그렇게 경계하던 농민-사민 연정이 이루어짐으로써 스빈후부드는 1937년 대선에서 칼리오에게 패배하여 낙선한다. 거기에 국민연합당의 당권도 파시즘을 극혐하던 [[유호 쿠스티 파시키비]]가 장악하면서 스빈후부드는 한순간에 몰락한다. 소련의 침공으로 [[겨울전쟁]]이 일어나자 스빈후부드는 [[히틀러]]와 [[무솔리니]]를 만나겠다고 이탈리아로 건너갔지만 [[교황]] [[비오 12세]]만 만나고 돌아왔다. 그야말로 갈 데까지 가 버린 셈이다. [[계속전쟁]] 때는 겨울전쟁 때 잃었던 땅을 되찾는 것을 넘어 소련 영토를 적극적으로 침공(즉 히틀러의 침공계획에 협조)해야 한다고 주장했다. 전세가 연합군 쪽으로 기울어 [[만네르헤임]]과 [[리스토 뤼티]]를 비롯한 국가지도부가 독일을 손절매하려고 뛰어다닐 때도 용역깡패 수괴 [[마르티 피흐칼라]]와 함께 "국민에게 고함"이라는 책자를 출판해 독일과 함께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. 핀란드 정부는 이들의 이런 짓거리를 그냥 내버려뒀다가는 소련과의 강화에 장애가 될 것이라 판단하여 피흐칼라를 체포했다. 스빈후부드는 국가원로여서인지 처벌을 받지는 않았지만 퇴물 취급을 받다가 1944년 죽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